[이슈]팔리지 않은 새 옷, 더 이상 태울 수 없다

EU가 바꾸는 패션산업의 재고 공식
황원희 기자 | eco@ecomedia.co.kr | 입력 2026-08-14 12: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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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유행이 지나거나 팔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새 옷과 신발을 소각하거나 매립하는 관행에 유럽연합(EU)이 제동을 걸어 눈길을 끈다. EU는 지난 7월 19일부터 역내 대기업이 미판매 의류와 의류 부속품, 신발을 폐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제를 본격 시행했다. 이번 조치는 2024년 발효된 ‘지속가능한 제품을 위한 에코디자인 규정(ESPR)’에 따른 것이다. 미판매 제품 처리 문제를 기업의 자율적인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활동이 아니라 법적 의무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함부로 폐기할 수 없는 의류

▲산더미처럼 쌓이는 의류 폐기물 
기업은 팔리지 않은 상품을 할인 판매하거나 다른 시장에서 판매하고, 자선단체·사회적기업에 기부하거나 수선·재제조해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폐기는 상품이 안전하지 않거나 심하게 훼손된 경우, 위조품 또는 지식재산권 침해 제품인 경우, 기부기관이 수령을 거부한 경우 등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허용된다.

예외를 적용받으려는 기업은 관련 문서나 시험 결과 등 증거를 남겨야 한다. 제품 처리 기록은 5년간 보관해야 하며 폐기한 상품과 사유를 공개해야 한다. 위반 기업에 대한 조사와 벌금 부과는 EU 회원국의 관계 당국이 담당한다. 규제는 우선 대기업에 적용되며 중견기업은 2030년부터 적용 대상에 포함된다. 소기업과 영세기업은 제외된다.

유럽에서만 매년 최대 59만톤의 새 섬유제품 폐기
EU가 의류와 신발을 첫 번째 폐기 금지 품목으로 선정한 배경에는 패션산업 특유의 과잉생산 구조가 있다. 유럽환경청 추산에 따르면 유럽 시장에 공급되는 섬유제품의 약 4~9%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폐기된다. 연간 26만4,000~59만4,000톤에 이르는 규모다.
 

옷 한 벌이 폐기되면 제품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원료 재배·추출부터 방적과 직조, 염색, 봉제, 운송에 투입된 물과 에너지, 화학물질, 노동력도 함께 낭비된다. 합성섬유 제품을 소각하면 원료인 화석연료에서 비롯된 탄소가 배출되고, 매립된 제품은 장기간 잔류하거나 미세플라스틱 발생원이 될 수 있다. 


그동안 패션기업들은 브랜드 가치 하락과 가격 질서 훼손, 위조·재판매 가능성 등을 이유로 재고를 폐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EU는 재고 폐기를 브랜드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계획 실패와 자원 낭비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 대량생산 후 남은 재고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수요예측을 통해 생산 자체를 줄이는 방식으로 전환하라는 신호인 셈이다.

프랑스가 먼저 금지…EU는 생산부터 폐기까지 규제

미판매 상품 폐기 규제를 가장 먼저 본격화한 국가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낭비방지 및 순환경제법(AGEC)’에 따라 2022년부터 의류를 포함한 미판매 비식품 제품의 소각과 매립을 단계적으로 금지했다. 적용 대상 기업은 상품을 재사용하거나 기부하고, 이것이 불가능할 때 재활용해야 한다. 현재는 생산자와 수입업자, 유통업자 전반에 적용되고 있다.

EU의 이번 조치는 프랑스식 규제를 역내 전체로 확대한 것이지만 폐기 금지에만 그치지 않는다. 2025년 10월 발효된 개정 폐기물기본지침에 따라 모든 회원국은 섬유·신발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를 마련해야 한다. 생산자는 시장에 내놓는 제품마다 분담금을 내고 이 재원은 폐의류 수거·선별·재사용·재활용에 사용된다. 내구성과 재활용성이 낮은 제품에는 더 많은 비용을 부담시키는 방식도 도입된다.
 

EU 회원국은 지침 발효 후 30개월 안에 섬유·신발 EPR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2019년 EU에서 발생한 섬유폐기물은 약 1,260만톤이지만 재사용이나 재활용을 위해 별도 수거된 물량은 약 5분의 1에 그쳤다.
 

앞으로 디지털제품여권(DPP)까지 도입되면 원료 구성, 재생원료 함량, 내구성, 수선 가능성, 재활용 방법 등의 정보가 제품과 연결된다. 생산량과 판매량, 남은 재고, 회수와 폐기까지 하나의 데이터 흐름으로 관리되는 구조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는 ‘책임 있는 섬유 회수법’에 따라 의류·섬유 생산자가 수거와 수선, 재사용, 재활용 비용을 부담하는 체계를 만들고 있다. 대상 생산자는 2026년 7월 1일까지 승인된 생산자책임기구에 가입해야 하며, 관련 계획은 2031년 전면 시행될 예정이다. 

한국은 폐의류 재활용 단계…‘미판매 재고’ 통계부터 부족
국내에서는 아직 EU와 같은 미판매 의류 폐기 금지나 기업별 공개제도가 본격화하지 않았다. 국가 폐기물 통계도 생활·사업장 폐섬유류를 중심으로 집계하고 있어, 기업이 판매하지 못한 새 옷을 얼마나 소각·매립·기부·재활용하는지 구분해 보여주는 공개 통계를 찾기 어렵다.
 

소비자가 배출한 헌 옷은 의류수거함이나 민간 수거업체를 통해 중고품으로 판매·수출되기도 한다. 반면 기업 재고는 할인 판매, 아웃렛, 기부, 해외 반출, 원단 회수, 소각 등 서로 다른 경로로 처리돼 전체 물량과 최종 행방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폐의류’ 통계만으로는 한 번 입은 옷과 한 번도 팔리지 않은 새 제품을 구분할 수 없다는 한계도 있다.
 

정부 정책은 이제 순환이용 체계를 마련하는 단계다. 2025년에는 정부와 섬유·의류업체, 재활용업체,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의류 환경협의체’가 출범했다. 해외 규제와 재활용 기술을 검토하고 생산부터 폐기까지 환경 영향을 줄일 법·제도 개선안을 논의하는 기구다.
 

2026년 정부 업무계획에는 경찰복 등 재질이 비교적 일정하고 대량 회수가 가능한 단체복을 우선 수거해 충전재·보온재로 만들거나, 화학적으로 분해해 장섬유 원료로 되돌리는 사업이 포함됐다. 폐의류 자동 선별과 한국형 에코디자인 기준 마련도 추진된다. 다만 현재 공개된 정책의 무게중심은 사용 후 의류의 회수·재활용에 있으며, 애초에 팔리지 않은 신상품의 생산과 폐기를 억제하는 제도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국내 기업도 남은 재고까지 관리해야
EU 규제의 직접적인 의무 주체는 역내에서 미판매 제품을 보유하고 처리하는 경제 주체다. 따라서 한국에서 제품을 제조해 EU 수입업자에게 납품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국내 중소 제조업체가 즉시 폐기 금지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의류추적 시스템(출처=윤회 홈페이지)

그러나 EU에 현지 법인이나 매장, 물류창고를 운영하는 국내 브랜드는 상황이 다르다. 현지에서 재고를 직접 관리하고 폐기한다면 기업 규모와 사업 구조에 따라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 EU 유통업체에 납품하는 기업도 거래처로부터 소재 정보와 재고 처리방안, 수선 가능성, 재활용 설계 자료를 요구받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반품과 이월상품을 본사로 되돌릴지, 현지에서 할인 판매·기부·수선할지 결정하는 역물류 체계가 중요해진다. 기부품이 다른 시장으로 흘러가 브랜드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위조품과 섞이는 문제를 막기 위한 추적관리도 필요하다. 단순히 소각을 기부나 재활용으로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산량과 품목 수를 줄이고 주문형·소량생산을 확대하며, 재고 발생률 자체를 경영지표로 관리해야 한다.
 

향후 패션산업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옷을 빨리 생산하느냐보다 얼마나 정확히 생산하고 오래 사용하며 다시 회수할 수 있느냐에 따라 갈릴 가능성이 크다. EU의 미판매 의류 폐기 금지는 재고가 더 이상 기업 내부의 회계상 손실에 그치지 않고, 공개하고 책임져야 할 환경비용이 됐음을 보여준다.
 

한국도 폐의류 재활용 기술 개발과 함께 기업별 미판매 재고의 발생·처리 실태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정 규모 이상 기업의 재고 폐기량과 처리방식 공개, 기부·수선·재판매 기반 확충, 섬유 생산자책임제 도입 여부도 논의해야 한다. 옷의 순환경제는 소비자가 헌 옷을 잘 버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팔리지 않을 옷을 처음부터 덜 만드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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