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뚜껑 하나에 307개체? 플라스틱 타고 일본까지 이동한 ‘미니 생태계’

황원희 기자 | eco@ecomedia.co.kr | 입력 2026-07-14 22: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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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바다에 버려진 지름 3.5㎝의 플라스틱 병뚜껑 하나가 300여 개체의 해양생물을 싣고 필리핀 인근에서 일본 남부 해역까지 이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단순한 오염물질을 넘어 생물 군집을 장거리 운반하는 인공 뗏목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다.

일본 나고야대학교와 산업기술종합연구소, 국립과학박물관, 일본해양연구개발기구(JAMSTEC), 교토대학교, 후쿠이현립대학교 공동연구진은 생물 부착 정보와 안정동위원소 분석, 해류 시뮬레이션을 결합해 플라스틱 병뚜껑의 표류 경로를 추정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Marine Pollution Bulletin’에 게재됐다. 연구진에 따르면 특정 플라스틱 조각 하나를 대상으로 부착 생물 군집과 생물이 경험한 환경의 화학적 기록, 해류 모델을 종합해 이동 경로를 추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진은 JAMSTEC의 해저 광역연구선 가이메이가 일본 고치현 남동쪽 해상에서 운용한 표층 채집망을 통해 플라스틱 병뚜껑을 회수했다. 병뚜껑에는 필리핀 음료회사의 라벨이 남아 있어 필리핀 또는 인근 지역에서 바다로 유입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병뚜껑 내부와 표면에서는 갯지렁이류와 코케무시류, 거북손류, 유공충, 편형동물 등 9개 분류군에 속하는 총 307개체가 발견됐다. 이 가운데 약 76.5%인 235개체는 나선형 석회질 관을 만드는 작은 갯지렁이류인 ‘Spirorbis’ 속 생물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생물은 몸길이 약 9㎝의 다모류 갯지렁이 ‘Eunice bipapillata’였다. 이 종은 지금까지 일본 해역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갯지렁이는 병뚜껑 내부 대부분을 둘러싸는 점액질 관을 만들어 매끄러운 플라스틱 표면을 틈과 부착 공간이 있는 복잡한 3차원 서식처로 바꿨다.

이 구조물은 작은 갯지렁이와 편형동물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유공충과 코케무시류 등 고착생물이 부착할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했다. 병뚜껑 하나가 여러 생물이 함께 살아가는 작은 산호초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 셈이다.

연구진은 병뚜껑의 기원과 표류 경로를 밝히기 위해 세 가지 단서를 활용했다. 먼저 병뚜껑에서 연안 해저와 산호초에 사는 생물뿐 아니라 외해의 부유물에 부착하는 생물이 함께 발견됐다. 이는 병뚜껑이 연안과 외해 환경을 모두 통과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두 번째 단서는 유공충 껍질에 남은 산소 안정동위원소였다. 유공충은 탄산칼슘 껍질을 형성하면서 주변 수온의 화학적 흔적을 남긴다. 연구진이 저서성 유공충 ‘Rosalina globularis’의 껍질 부위를 분석한 결과, 일부 개체가 약 22~30℃ 범위의 수온을 경험한 것으로 추정됐다. 채집 당시 현장 수온은 약 21.8℃였다.

마지막으로 연구진은 해류 모델에 가상 입자를 투입해 병뚜껑의 이동 가능 경로를 재현했다. 그 결과 필리핀 최북단 바타네스제도 인근에서 출발한 부유물이 검은해류인 쿠로시오 해류계를 따라 이동해 최소 약 70일 만에 채집 지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뮬레이션상 이동 경로의 해수면 온도는 약 22~26℃로, 유공충 동위원소 분석 결과와 대체로 일치했다. 연구 논문

해양 플라스틱은 생물의 섭식이나 얽힘을 유발하는 직접적인 오염원으로 주로 다뤄져 왔다. 하지만 나무와 해조류 같은 자연 표류물보다 오랫동안 해수면에 남을 수 있어 부착 생물을 먼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수단이 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이번 연구는 갯지렁이처럼 주변 환경의 물리적 구조를 변화시키는 ‘생태계 엔지니어’가 작은 플라스틱에 정착할 경우, 다른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은신처와 부착 공간까지 형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개별 생물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생물 군집 전체가 장기간 이동할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병뚜껑에 실려 이동한 생물이 새로운 해역에 실제로 정착하거나 번식했는지는 이번 연구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결과를 곧바로 외래종 침입 사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연구진은 플라스틱 쓰레기가 외래생물의 잠재적인 유입 경로가 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앞으로 소형 플라스틱 쓰레기에 생물 군집이 형성되는 빈도와 장거리 표류 중 생존 가능성이 높은 분류군을 조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플라스틱을 통해 이동한 생물이 새로운 환경에 도달해 정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생태학적 영향도 후속 연구 과제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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