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담양고씨 사건」발생 공해피해 일깨워
울산 식수오염사고 환경청 신설 원인으로 진전

성장제일주의로 인하여 공해문제는 의도적으로 무시되었고, 대도시와 공업단지의 환경오염문제는 악화 일로였다. 또한 농촌은 새마을운동에 힘입어 소득배가 사업에 들떠있었지만 폐비닐공해라는 골칫거리를 안게 되었다.
이러한 오염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나온 대책이 대대적인 자연보호 운동의 전개였다. 자연보호헌장의 선포까지 가져온 자연보호운동은 훌륭한 정신을 함의(含意)하고 있으나, 그 현실적인 의도는 쓰레기 줍기 운동의 실천이었다.
정부의 예산이 별로 안 들고 기업의 생산활동에 부담이 안 되는 방법으로 우리 주변을 정화하자는 것이다. 당시 새마을 운동의 열기와 함께 자연보호운동은 산하(山河)의 주변을 깨끗이 유지하는데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자연보호운동으로 오염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정부의 공해방지 무(無)대책 상황에서 크고 작은 오염문제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8년 소위 「담양고씨 사건」이라는 것이 발생하였다. 언론은 이 사건을 놓치지 않고 사회문제로 크게 부각시켰다. 공해병이라고 떠들썩하였다. 일본의 이따이이따이병과 미나마따병과 같은 공해병의 피해사례도 소개되었다.
그 후 의료기관의 정밀진단결과 「담양고씨 사건」은 농약 중독증세의 결과라는 최종결론이 있었으나, 여하간 이 사건은 이후 일반국민에게 공해의 무서운 피해를 일깨우게 되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1979년에 울산공단에 있는 어느 공단의 식당에 공급되는 식수가 오염되어 근로자들이 복통을 일으키는 식수오염사고가 일어났다.
「담양고씨 사건」이후의 일이라 언론이 대서특필하였다. 이즈음 집단 노동활동이 체제유지에 중대한 위협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근로자들의 집단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식수오염사고는 중대한 사고로 다루어졌다. 이 사고가 환경청 신설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진전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실효없는 ‘공해방지법’ 폐지, ‘환경보전법’제정
환경행정 조직·인력 절대부족 法 「빛좋은 개살구」
1979넌 5월 중순경 대통령이 「환경청」발족을 내각에 지시하였다는 보도가 조간신문의 1면 톱을 장식하였다. 매우 갑작스럽고 통상적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정책결정이었다. 정부의 청(廳)단위 정부조직을 신설하는 정책을 결정하기 위하여 통상적으로는 얼마나 많은 뜸을 들이는 작업과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이 지시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그 당시 보건사회부 환경관리실의 환경기획 담당관이라는 직책으로 환경업무에 종사하던 필자로서는 이 조간신문의 기사를 접하면서 어안이벙벙하였다. 그 때의 정부 환경행정조직을 보면 보건사회부라는 환경관리관이 전부다. 그 직원이 30명도 못되는 소규모 국(局)단위 조직이었다.
장·단기 환경계획이나 정책을 구상하여 집행하기에는 너무 작은 조직이었다. 여하간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오염문제에 대하여 정부로서는 무엇인가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법률체제를 정비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 실효성 없는 「공해방지법」을 폐지하고, 「환경보전법」(지금의 대기환경보전법, 수질환경보전법, 폐기물관리법의 모체라 할 수 있음)을 제정하였다. 환경정책의 획기적인 전환 시도(試圖)라 볼 수 있었으나, 문제는 이 법을 집행 할 수 있는 조직과 인력이다. 조직과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환경보전법」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환경보전법」하나 만들어 놓은 것으로 만족하면서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환경문제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환경청 발족을 지시한 것이다.
환경교수진 주축 울산 공해대책 논의돼
신현확 부총리 환경청 설치 필요성 주장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갑작스러운 결정이 내려졌을까? 이 지시가 있기 전 날 청와대에서 안보관련 장관대책회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 회의는 그 당시 자주 발생하는 각종 소요(騷擾)사태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열리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울산의 식수오염 사고에 따른 근로자들의 불만과 소요 우려 등이 보고 되고, 울산의 공해대책이 논의되었다고 한다. 논의의 방향은 환경교수들로 구성하여 울산지역 오염실태를 종합조사한 후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당시 신현확 부총리는 보다 적극적인 공해방지대책의 필요성과 환경청의 설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고 한다. 신현확 부총리는 경제기획원장관을 맡기 직전인 보건사회부장관 재임기간 중에 환경보전법의 제정에 특별한 관심과 노력을 경주하였으며, 일본의 환경정책 등에 대하여 많은 독서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환경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는 신 부총리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 대통령은 울산지역의 식수오염사고를 불길한 조짐으로 판단하고, 이 대책회위에서 환경청의 발족을 결정하고 이를 즉시 내각에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환경문제가 체제안보문제와 관련되면서 환경청발족이라는 신속한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산업공해방지업무가 전부인 왜소한 환경청
각 부처 환경관련업무 통합·일원화가 관건
이 지시에 따라 보건사회부 환경관리관실이 중심이 되어 환경청 설치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보건사회부가 맡고 있는 환경업무라는 것이 국민보건과 직접 관련되는 산업공해방지업무가 전부였다.
이는 환경업무 중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각 부처의 기능과 관련되는 환경업무는 각 부처에 산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환경청을 발족하면서 가장 어려운 과제는 각 부처에 산재하여 있는 환경관련 업무를 통합·일원화 하는 일이었다. 특히 건설부의 수자원 업무, 자연공원업무 그리고 산림청의 야생동식물 보호 업무 등을 일원화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실무적으로 만들어진 당초의 환경청설치안은 이와 같은 환경업무 전반을 그 기능 속에 포함하여 놓았다. 그러나 소위 부처이기주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0년 환경청이 그 모습을 나타낼 때에는 산업공해 방지업무만을 주된 기능으로 하여 발족하게 되었다.
그때의 분위기는 대통령의 지시 때문에 환경청 발족은 서둘렀지만 그 기능과 인력은 최소화시키려는 것이었다. 1979년말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환경청 설치를 지시하신 분의 깊은 뜻과 의도는 실종된 채 환경청이 발족하게 된 것이다.
오염사고 되풀이, 상하수도업무 환경처로 이관
환경청발족 구상안 완전실현 때 선진 환경행정
환경청 발족 후 14년이 지난 1994년에야 몇 번의 물 오염사고를 겪은 후 상하수도업무가 환경처로 이관되었고(그것도 수자원관리 기능은 아직도 건설교통부에 남겨놓은 상태에서), 얼마 후 자연공원 업무와 야색동물 보호업무가 환경부로 넘어갔다. 환경청발족 작업 때의 구상안이 완전히 실현되는 때에 명실상부한 선진 환경행정이 구현되리라고 기대해 봄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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