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상 소장의 환경이야기 / 우리의 내셔널트러스트

편집국 | eco@ecomedia.co.kr | 입력 2004-11-22 13: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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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에 붉게 물든 해변, 완만하게 드넓은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다보면 맑은 물이 샘솟는 곳을 어렵지 않게 만나고 그대로 주저앉아 입 대고 들이키곤 했던 인천의 오랜 백사장. 지금은 없다. 이미 매립돼 사라졌다.
“먼 곳에 사는 절친한 친구가 제 스스로 찾아왔을 때, 얼마나 기쁜가!” 옛 성현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찾아온 친구와 어디를 가면 가장 인천답고 좋을까. 낙섬! 맞다. 낙섬에 가야 한다. 백사장이 매립돼 사라진 마당이니 낙섬에 가자. 낙섬 마루에 올라타는 석양을 바라보면 곧 헤어져야 할 친구의 가슴에 미어질 듯 벅차 오르는 환희를 안겨주리라. 그 낙섬, 지금은 가슴에만 있다. 역시 매립돼 사라졌다.
지금도 한강 한가운데의 모래 섬으로 보전돼있다면, 열대야 현상으로 잠못 든 서울시민들은 먼지 푹푹 날리는 둔치보다 여의도를 찾을 텐데. 빌딩으로 뒤덮인 아스팔트 바다엔 출퇴근 인구만 넘실댈 뿐, 일상에 지친 시민들의 휴식은 여의도와 멀다. 지금 여의도가 모래 섬으로 보전돼 있다면, 정부나 건설업체에서 아스팔트 광장과 빌딩 숲으로 개발하려고 할 때 시민들이 가만히 있을까. 호주머니 돈을 추렴해서라도 보전하려고 애를 쓸 것이 틀림없다.
거품경제로 흥청거릴 때 리조트 법은 일본 자연의 곳곳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앞다투며 스키장과 골프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북해도의 작은 사리마을은 달랐다. 전국의 일본 시민들에게 편지를 내어 위기에 처한 아름다운 산하 ‘시레도꼬’를 살려내자고 호소하였다. 이른바 100평방미터 운동이 그것이었다. “100평방미터의 땅값 일만 엔을 내주시면 그 돈으로 개발 예정지를 사서 보전하겠습니다. 명예지주가 되어주십시오”하는 사리마을 주민들의 진심 어린 호소는 일본 국민들을 움직였고, 수십만 명이 기꺼이 내준 돈으로 사들인 개발 예정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사리마을은 시레도꼬자연센터로 영구히 보전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북해도의 시레도꼬 현장에 가면 명예지주의 작은 명찰이 전시된 공간이 있다. 일본 전역의 명예지주들은 기쁜 마음으로 현장에 다녀간다. 이른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이었다.
내셔널트러스트, ‘자연신탁(自然信託)’으로 고쳐 말하기도 하는 내셔널트러스트는 “모금이나 기부를 통해 확보한 보존가치가 있는 자연자원과 문화자산을 영구 보전 관리하는 시민환경운동”이다. 19세기 후반, 막바지에 치달은 산업혁명은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영국인들의 자존심인 수많은 자연유산과 자연생태계를 거듭 훼손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변호사와 목사는 여성사회운동가와 함께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을 전개, “아름답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토지(자연)와 건물을 국민의 이익을 위하여 영구히 보존해야하고 취득한 대상물에 대해서는 양도불능을 선언”하는 내셔널트러스트 법을 쟁취했다.
정부의 해안 개발계획을 저지해 영국 해안의 17퍼센트를 보전하기 위해 소유하고 1.5퍼센트의 토지를 영원히 지키고 있는 영국의 내셔널트러스트 단체는 물론 자연유산만 보전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산업혁명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는 공장이나 운하를 시민들이 기부하여 마련한 자금으로 구입, 문화유산으로 보전하고 있다. 이렇듯 개발의 소용돌이로부터 그 나라의 자연문화유산을 지켜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영국에서 유럽, 미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로 퍼져 지금은 세계 26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어떤가. 역사가 미천한 호주나 미국에도 자연문화유산을 보전하려고 시민들이 모이고 있는데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일제 강점기와 민족상쟁의 서글픈 파괴 역사를 피하고 용케 보전되어 온 문화유산들이 군사독재정권의 강압적 개발로 인해 하나 둘 사라지면서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던 시민들이 모였다. ’98년 우리의 자연문화유산을 보전하려는 시민운동을 공식 천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10년 전부터 기슭까지 파고드는 개발로부터 지켜내려는 광주시민들이 ‘무등산 공유화 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었다.
’98년 공식 깃발을 든 사단법인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02년 5월 강화 초지리에 가녀리게 남아있는 매화마름 군락지를 농경지로 개발될 위기에서 구해 자연유산으로 보전하고, 같은 해 12월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탐미적 사학자인 최순우 선생의 전통 한옥을 구입, 문화유산으로 복원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할 계획을 갖고 있다. 내셔널트러스트라는 공식 깃발은 들지 않았지만, ’03년 상반기 현재 전국 19개 지역에서 자연문화유산의 보전을 위한 시민운동은 쉬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반만년 역사를 품고 살아온 민족으로서 아주 당연한 행동이라고 여기지만, 자본은 물론 지역사회 민중들의 뇌리까지 파고든 고래힘줄보다 질긴 개발욕구를 잠재우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자연이 문화가 “밥 먹여주냐!”는 언성을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주소다.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넋을 잃었던 인천시민들은 차디찬 샘물이 솟던 해변을 지키지 못한 걸 아쉬워한다. 당시엔 누구도 개발독재정권에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낙섬이 남아있다면 시민들의 삶은 지금보다 퍽 여유로울 텐데. 모두들 안타까워한다. 그 흔했던 갯벌과 염전들을 거의 다 잃은 인천은 ‘풀등’ 마저 잃어간다. 썰물 시 바다 한 가운데에서 장엄하게 펼쳐지는 모래사장, 즉 풀등은 의지만으로 보전할 수 있건만. 이 시대 토목건축의 생명줄이라는 바다모래는 오늘도 마구잡이로 퍼간다.
문인들이 “인천에는 바다가 없다!”고 한탄한 인천만이 아니다. 삼천리금수강산의 자연유산들이 현재 위기에 처해있다. 영월 댐으로 수장될 뻔했던 동강도 밀려드는 행락객과 그 행락인파를 수용하려는 개발업자들의 등쌀로 수려한 자태를 잃으려 한다. 유사 이전의 고래잡이 기록이 조각된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도 자본의 앵벌이로 내몰릴 위기에 몰리고 있다.
내셔널트러스트가 남아있는 희망이다. 자연과 문화의 아련한 추억을 자식들에게 맥없이 전달해주기보다 시민들의 행동으로 지켜낼 수밖에 없는지 모른다. 뿌리 없는 후손에게 안정된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이므로. 그를 위해 우선, 우리 뇌리에 각인된 개발최면을 걷어낼 수 있도록, 내 마음의 내셔널트러스트부터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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