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똥오줌·오수가 자원으로 활용되기까지

우리나라 근·현대 똥오줌·오수 관리 변천사
김명화 기자 | eco@ecomedia.co.kr | 입력 2021-03-16 1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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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 교수 목포해양대 환경생명공학과

 

우리나라의 근·현대(1900년 이전)에서 똥오줌을 포함한 폐기물을 2회에 걸쳐 다루고자 한다. 먼저 이번 호에서는 똥오줌을 이용한 비료의 종류와 만드는 방법, 시비 방법 그리고 옛날의 화장실 형태에 대한 설명이다. 다음 호에서는 똥오줌을 포함한 폐기물의 관리행정 변천사를 살펴본다. <글쓴이 주>

과거 똥·오줌·재·오수 처리
현재, 우리나라의 「폐기물관리법」에서 폐기물이란 “쓰레기, 연소재(燃燒滓), 오니(汚泥), 폐유(廢油), 폐산(廢酸), 폐알칼리 및 동물의 사체(死體) 등으로서 사람의 생활이나 사업활동에 필요하지 아니하게 된 물질”로 정의하고 있다. 동법에서 폐기물은 1차적으로 발생원에 따라 생활폐기물과 사업장폐기물로, 2차적으로는 유해성에 따라 사업장일반폐기물과 지정폐기물로, 3차적으로 발생특성에 따라 사업장생활계폐기물, 사업장배출시설계폐기물, 건설폐기물, 의료폐기물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렇게 다종다양한 발생원에서 배출되는 폐기물은 그 발생원 이상의 다양한 물리적·화학적·생물학적 특성이 있어 처리·처분 방법 또한 매우 복잡하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 조상들이 배출했던 폐기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으며, 어떻게 처리·처분하였을까?


<북학의>에서는 똥, 오줌, 재를 거론하고 있으며, 이것이 오늘날의 폐기물이다. 조선시대는 전통적으로 내림상 문화로서, 웃어른, 부모, 자식 순으로 또는 손님, 집주인 순서로 식사를 하였다. 조선 전통적인 식문화였던 내림상 문화로 인해 음식물이 남겨질 여지는 매우 적었을 것이다.


이런 양상은 조선후기에만 나타난 현상이었을까? 조선전기, 고려시대와 그 이전에는 어떤 폐기물이 발생했을까? 주장의 출처나 작품의 순수성은 차치해 두고, 통일신라시대의 유행병 창궐 원인을 음식물 찌꺼기, 똥, 오줌, 재의 부실한 관리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연구를 보면, 문제가 되는 것이 <북학의>에서 제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문헌으로 본 기록에는 

528년에 건립된 신라시대의 불국사에서는 일을 본 후 물을 부어 앞에 뚫린 구멍으로 씻어내리는 변기로 여겨지는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사용한 물에 의해 비료성분이 희석되어 비료효과가 떨어져 비료로써 활용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백제 무왕(600~641년) 때의 측간으로 보이는 3곳이 발굴되었다. 일본 <고사기(古事記, 712)>에 신무천황 설화가 나오는데, 물 위에서 대소변을 보고 흘려보낸 가와야(厠, 측간; 河屋, 물 위의 집)라는 시설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7~9세기의 한반도나 일본의 경우, 인분 저장시설이 분명치 않고, 도랑물이나 수로를 통해 성곽 또는 건물 외부로 흘려보냈을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에는 똥을 아직 적극적으로 비료로는 활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태종 11년(1411년)에 성안에 주택지가 부족하여 채소밭 경작마저 금지했다. 공식적으로는 사대문 안에는 논밭이 없어야 하나, 실제로는 밭뿐 아니라 논, 미나리꽝, 목화밭까지 있었다. 성안에서 배출된 분뇨는 이런 농경지에 일부 처리·처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어떤 형태로 활용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시 한양의 인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세종 10년(1428년)의 한양 인구 10만 명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가정하면, 똥·오줌의 1일 발생량은 130kL, 1년 발생량은 47,450kL로 추산된다. 교통이나 운반수단, 기술 등이 현재와는 전혀 다른 당시에 이런 많은 양의 분뇨를 처리·처분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며, 이런 문제의 중첩으로 <북학의>와 같은 작품이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숙종 37년(1711)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예문관의 측간을 소제하는 전연사 군졸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궁궐 뒷간 청소를 담당하는 군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영조 6년(1730) <승정원일기>에 영경문 길가에 있는 일반인이 사용하는 공중변소를 정비해야 한다는 기사가 있어, 궁궐 주변 사람의 출입이 많은 곳에도 공중변소를 설치하여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도시와 농촌 간 환경문제 대두
그 후 박지원(1737~1805)이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 언급한 예덕선생은 전문 똥오줌 수거인으로, 9~10월에 사람 똥, 마구간의 말똥, 외양간의 소똥, 홰위의 닭똥, 개똥, 거위똥, 돼지똥, 비둘기똥, 토끼똥, 참새똥을 수거 후 순무, 가지, 오이, 수박, 호박, 고추, 마늘, 부추, 파, 염교, 미나리, 토란 등의 농사꾼에게 팔았으며, 그 수입은 1년에 6,000전(600냥)이었다고 예덕선생의 공을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그 시대에는 똥의 시비 효과를 크게 보았음을 예덕선생전에서 기록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앞에서 언급한 똥 수레를 끄는 자가 예덕선생과 같은 업자일 수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동시대의 박제가(1750~1805)는 <진상본 북학의>에서 마른 똥을 퇴비에 이용하기 때문에 퇴비 효과가 온전치 않다는 점과 성안의 똥을 완전하게 수거하지 않아 환경적·위생적 문제가 발생하며, 또한 도시와 농촌 간 똥과 재의 균형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똥·오줌·재의 문제가 조선 초기부터 수백년 이어오면서, 오수와 똥·오줌의 배출구로써 활용해 오던 개천(청계천)의 사정은 절정에 이르렀고, “아, 도성 안에 백성이 너무 많다”며, 장탄식한 영조(영조 36년, 1760)는 드디어 2개월간의 개천 준설공사를 실시하게 되며, 그 후 1773년에 개천의 다리 보수공사와 제방 강화공사를 실시하였다. 1760년 개천의 준설공사가 끝나고 영조는 준천사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개천의 준설업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한양 인구는 조선 초기 10만에서 조선 후기 2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한 이후, 순조 33년(1833)에 3개월간의 개천 준설공사를, 철종 7년(1856)에 개천 준설공사와 제방 공사를, 그후 고종 2년(1865년 3월)에 대규모의 개천 준설공사를 또 실시하였다.


비료, 분뇨 생산과 사용은
사람의 똥이나 가축의 똥을 언제부터 또는 어떤 계기로 활용하였을까? 사람의 똥은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냄새나는 배설물이기에 꺼리게 되나, 개나 돼지는 옛날부터 그것을 먹고 자랐다. 먹고 자랐다는 의미는 여전히 영양분이 있다는 의미이며, 최덕경은 씨앗에서 열매가 열리는 것을 보면서 똥이 종자에게 보탬을 줄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된 듯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고구려에서 똥으로 토지에 시비를 했다거나, 고려시대가 되면서 분전이 나타나는 것을 보아 빠르게는 삼국시대인 7세기 이전부터, 최소한 늦어도 12세기 고려 명종(明宗) 이전에는 똥을 전답에 시비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으나, 그 똥이 인분인지, 가축분인지는 불분명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인분이 농업생산의 비료로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은 중국이나 조선 모두 벼농사와 뽕나무 재배와 관계가 있으며, 10세기 무렵 한반도의 경우 인분이 밭농사의 시비용으로 사용된 반면, 송대의 경우 벼농사에 주로 이용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16–17세기에는 조선에서도 향촌 지식인들에 의해 각종 농서와 잠서(蠶書)가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전국적으로 벼농사와 양잠(養蠶)이 확대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때부터 벼농사나 뽕나무 농사에서 인분뇨의 역할은 양국이 동일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15세기 중엽의 <농사직설(農事直設)>이래 여러 농서를 통해 조선에서는 똥오줌을 재와 섞은 똥재 종류(糞灰, 尿灰, 熟糞)를 밑거름으로 널리 활용했음을, 17세기 초 고상안의 <농가월령(農家月令)> 이후, 특히 19세기 전반이 되면 오줌을 따로 모아 액상의 웃거름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퇴비, 똥재와 오줌재
똥오줌과 낙엽 관련된 퇴비의 종류와 특징이다. 먼저, 숙분(熟糞)이 있다. <농사직설>에 가장 널리 쓰인 비료로 똥재(糞灰)와 오줌재(尿灰)를 이르는 것으로, 만들어지는 시간이 오래 걸려 똥재와 오줌재를 통틀어 숙분(熟糞)이라고도 한다.


다음으로, 인분·축분·잠사(人糞·畜糞·蠶沙)가 있다. 이는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을 원형 그대로 거름으로 쓰는 것으로, 이때의 똥은 모두가 생똥(生糞)으로, 숙분과는 다른 것이다. 낙엽과 관련된 것으로 갈잎거름(杼葉糞)이 있다. 

 

이는 봄철 일찍이 잎이 피는 참갈나무, 떡갈나무, 도토리나무 등의 어린 가지와 잎을 베어다 벼논의 녹비(綠肥)로 쓰는 것으로, 밑거름으로 전면심층시비에 쓰이는 것이다.


또, 벼농사에서 벼의 성장을 돕기 위해 고안된 속효성 비료로, 인분에 물을 탄 청수분(淸水糞)이 있으며, 이렇게 활용하면서 인분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다고 보고 있다. 청수분에 대한 기록은 17세기 후반 일본의 <회진농서(會津農書)>에서도 볼 수 있으며, 청수분을 만들 때 염기가 많은 즙을 인분과 함께 섞어 시비하면 다양한 해충이 발생한다고 주의하고 있다.


특히, 한반도에서 똥재는 온돌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가장 한국적인 시비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분뇨를 재와 섞으면, 냄새가 거의 없어지고, 외관상 흉하지도 않게 되며, 재가 똥오줌의 수분을 흡수하여 고형 상태가 됨으로써 저장과 취급이 편리해지고, 재의 강한 알칼리성으로 변균의 번식을 막고, 기생충을 사멸시킬 수 있으며, 구더기나 벌레 등도 모이지 않게 된다.


똥오줌과 재를 퇴비로 사용하기 위해 권하고 있는 변소의 형태를 보면, 측간 바닥을 파서 똥오줌을 받을 수 있는 용기를 묻고, 재를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을 두도록 하고 있다.

조선 후기 변소의 구조로 기록에 “인민의 집 담 구멍으로 똥오줌을 흘려보냈다”라는 것을 보면, 농사에 똥오줌을 사용하지 않았던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집 밖으로 구멍을 뚫어 생활오수와 똥오줌 같은 오물을 흘려보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개천에 모인 똥오줌, 재 등은 하천의 바닥을 높이고, 적은 강우로도 범람이 잦았을 것이다. 궁궐의 하수구를 ‘오간수문’이라 했으며, 큰물이 지면 이 오간수문으로 개천물이 궐내로 역류했다. 똥오줌의 부적절한 관리와 이런 잦은 범람에 의해 한양 도처에 똥오줌의 흔적을 남겼을 것이며, 그 흔적의 일부가 옛 도성 토양에서 기생충 알로 확인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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