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디어= 황원희 기자] 기후위기는 더 이상 탄소만의 문제가 아니다. 에너지 전환, 양극화, 일자리 감소, AI 확산, 지역 소멸까지 서로 얽힌 위기 속에서 SDX재단은 ‘살림셀’이라는 새로운 사회 구조를 제안하고 있다. 본지는 SDX재단 전하진 이사장을 만나 기후 대응의 한계와 이를 넘어 인간의 삶과 공동체, 도시의 구조를 다시 묻는 실험적 구상을 따라가 보았다.
새로운 역할 모색하는 과정에서 기후에너지로 눈돌려
SDX재단은 처음부터 기후만을 바라보고 출발한 조직은 아니었다. 재단의 출발점은 오히려 판교에 실리콘밸리식 혁신 문화를 심고, 기업과 대학, 청년과 산업을 잇는 가교를 만드는 데 있었다. 디자인 씽킹을 국내에 도입하고, 판교와 인근 대학들을 연결해 새로운 혁신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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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하진 이사장 |
하지만 초기 구상은 기대만큼 쉽게 풀리지 않았다. 대학생들이 기업과 함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커리큘럼을 통해 혁신 문화를 확산시키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이후 재단은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유엔과의 협력 제안 등을 계기로 방향을 다시 잡았고, 지금은 기후·에너지·사회 시스템 전환을 함께 다루는 실험적 플랫폼으로 자리를 바꾸고 있다.
SDX재단 전하진 이사장은 제19대 국회의원과 한글과컴퓨터 대표이사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으며 나름대로의 경륜을 통해 한동안 자발적 탄소시장 구축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4년 동안 자발적 탄소시장을 만들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기존 방식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자발적 탄소시장 한계보여
그가 지적한 핵심은 현재의 자발적 탄소시장 구조가 개인의 참여를 담아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기존의 VCM(자발적 탄소시장)은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보완하는 틀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측정·검증·인증 절차가 지나치게 까다롭고, 그 결과 개인이 일상에서 줄인 소규모 탄소 감축량은 사실상 제도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개인이 오랜 시간 노력해서 1톤을 줄여도, 그것을 인증받아 실질적 가치로 연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서 SDX재단이 꺼내든 개념이 VDC(자발적 감축 목표)다. 이는 국가가 정한 목표 밖의 영역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스스로 감축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실천하고 기록하며 데이터를 축적하자는 발상이다. 따라서 그는 “아직 거버넌스가 닿지 않은 영역에서 시민과 공동체가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메워가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재단은 ‘조각탄소 이니셔티브(Mini Carbon Initiative)’라는 메커니즘도 제안했다. 이는 거대한 감축 프로젝트가 아니라 소규모 감축 활동과 기술 단위에 주목하는 방식이다.
자립구조 공동체 ‘살림셀’ 제안
그는 “기후 문제만 해결한다고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며 양극화, AI에 따른 일자리 감소, 에너지 불안, 사회적 불안정성이 동시에 닥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기후만 들여다보다가, 결국 우리 삶 전체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 등장한 개념이 바로 ‘살림셀’이다. 그는 살림셀은 단순한 전원마을이나 친환경 주거단지가 아니라, 에너지와 물, 식량, 돌봄, 일자리, 커뮤니티가 결합된 논리적 단위라고 설명했다. 도시의 취약한 중앙집중형 인프라를 대체할 수 있는 분산형 세포 구조로, 필요할 때는 스스로 닫혀 생존하고 평소에는 다른 셀과 연결되며 작동하는 사회 기본 단위라는 것이다. 실제 그의 생각을 담은 신간 《돈이 당신을 지켜주지 못할 때》도 이러한 구상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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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의 도시는 너무 비합리적”이라며 “전기와 물 공급이 멈추면 고층 아파트도 곧바로 무력해진다. 앞으로는 전쟁, 재난, 기후위기, 사회불안 등으로 이런 상수가 변수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도시라는 고분자 구조는 급소를 맞으면 전체가 마비되지만, 세포 구조는 일부가 타격을 받아도 전체가 무너지지 않는다”며 살림셀이 더 단단한 사회 하부 구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살림셀의 핵심은 지산지소형 자립 구조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기본 에너지를 확보하고, 물과 식량, 생활 인프라를 가능한 범위 안에서 지역 단위로 순환시키는 방식이다. 그는 지금처럼 AI 전력을 충당하기 위해 발전소와 송전망을 대규모로 확장하는 대신, 그 비용을 지역 자립형 인프라 전환에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전탑을 세우는 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드는 만큼, 그 돈으로 지역이 스스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구조를 만들면 더 빠르고 지속가능한 전환이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살림셀...생존의 시스템뿐 아니라 새로운 인간형 육성
그는 특히 AI 시대와 살림셀 구상이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중앙집중형 산업 구조에서는 AI 확산이 전력 수요와 일자리 감소를 동시에 악화시킬 수 있지만, 분산형 살림셀 구조에서는 지역이 스스로 생존 기반을 갖추고, 남는 자원은 AI와 연결해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AI가 에너지를 관리하고 셀 간에 필요한 전력을 교환하는 구조까지 가능해지면, 세포와 세포가 소통하는 사회 인프라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살림셀은 물리적 공간의 크기로 고정되는 개념도 아니다. 한 마을이 될 수도 있고, 군부대나 대학, 산업단지, 전원주택 단지, 심지어 폐교를 활용한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전국의 폐교 4천여 곳을 살림셀로 전환하는 상상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에너지와 식량을 자체 생산하고, 돌봄과 생활을 공동체 안에서 분담하면 청년들의 생계 부담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실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살림’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택했다고도 설명했다. 어머니들이 해온 살림의 경험 속에 단순한 가사노동을 넘어 공동체 유지, 생존, 순환, 돌봄의 지혜가 축적돼 있다는 판단에서다.
나아가 그는 살림셀이 단지 생존의 시스템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형을 키우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 사회가 돈과 명예 중심의 가치관을 주입해왔지만, 앞으로는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서 각자가 자신의 관심과 재능을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사회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완성형은 아니지만 인식전환의 계기로
이 같은 전환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전 이사장은 “앞으로 5년 안에 어떤 형태로든 전환이 시작돼야 한다”며 “2030년 전후가 하나의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후위기, AI, 에너지 문제, 양극화가 동시에 임계점에 다가오고 있는 만큼, 지금의 방식만으로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실제 현장 반응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지자체 관계자, 산업계 관계자, 지역 혁신가 등이 살림셀 개념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포천의 한 대규모 주거단지는 독립형 가로등과 투수블록 등 일부 요소를 먼저 도입했고, 전원주택 단지 등에서도 유사한 구상이 논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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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전 이사장은 올해를 “인식 전환의 해”로 규정했다. 당장 완성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살림셀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에 맞는 모델에 어떤 보상을 줄 수 있을지 구조를 설계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은 태양광은 태양광대로, 스마트팜은 스마트팜대로, 일자리 문제는 일자리 문제대로 각각 흩어져 있다”며 “이것을 하나의 논리 구조 안에 넣어 사회 전체의 솔루션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SDX재단이 제안하는 것은 단순한 환경 담론의 확장이 아니다. 탄소 감축의 한계를 넘어, 분산형 에너지, 지역 자립, 공동체 복원, 새로운 노동과 삶의 방식까지 포괄하는 문명 전환의 상상력에 가깝다. 아직은 낯설고 거대한 구상처럼 들리지만, 인터뷰 말미의 표현대로라면 지금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먼저 “시도해보고 질러보는” 단계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실험의 이름이 바로 ‘살림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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