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누리의 생명을 위해

- 21C 환경은 모든 생명 중심 체제로 전환되어야 -
편집국 | eco@ecomedia.co.kr | 입력 2007-02-13 14: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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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로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다는 왜곡된 가치관
우리는 팽팽하게 맞선 상반된 원칙을 놓고 선후를 가리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자유와 평등, 성장과 분배, 개발과 환경 등 현실 속의 묵직한 쟁점들이 대개 이런 경우다. 우리 사회가 지금 겪고 있는 혼돈과 혼란, 불안 등은 이러한 가치 충돌의 결과이다.
환경문제도 그렇다. 환경의 파괴나 오염 등이 우리가 해결해야 될 코앞의 과제인 걸 알면서도 우리는 무모하게도 개발을 앞세워 자연환경을 훼손하고 죽여가고 있다. 기술은 쓸모없는 인간의 욕구를 충족해주는 가장 좋은 도구로 날마다 커간다. 우리는 예전에 비견할 수도 없을 만큼 잘 살게 되었어도 더욱더 잘 살고 편리하고 즐기기 위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고리를 더욱더 탄탄히 묶고 있다. 그러면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특징이 된 산업사회의 생활방식을 더욱더 확장해 나간다. 그러나 인류는 20세기의 경험을 통해, 인간을 중시하지 않는 어떤 철학, 어떤 지식, 어떤 기술로도 인간을 행복하게 하거나, 성공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나가는 것 또한 불가능함을 경험하고 있다. 지진, 해일, 태풍, 홍수, 지구온난화 등 지구 각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 재앙 앞에 인간이 얼마나 초라해지고 무력한지. 말이 없다고 자연을 마구 파헤쳐 훼손하고 제한되어 있는 자원을 마구 써서 더 많이 생산하여 더 많이 먹고 즐기려 한다. 반자연적인 삶의 태도와 자연섭리를 어긴 인간들의 무모한 도전과 오만함에 내린 자연의 경고 앞에서도 겸허해 질줄 모르는 인간들에게 자연은 또 어떤 벌을 내릴지 걱정하게 된다.

라듐특허 안낸 큐리부부, 인류의 기념비적 도덕유산
이제 더 큰 재앙으로 파멸의 길을 택할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을 찾아나서야 한다. 우연한 존재인 인간이 이 우주에서 어떤 생물체보다 자유로운 주체이며 동시에 그 인간들의 선택에 의해 자연이나 세계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막중한 윤리적 책임을 갖고 있음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 인간도 대자연 속에 살아가는 한 개체에 불과하며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도 나름대로 소중하고 가치 있음을 다시 새겨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과 절대적 관계일 수밖에 없는 자연을 인간의 횡포로부터 해방 시키고 그 본성조차 잃어가는 자연을 보존하고 되살려낼 수 있다. 자연의 비밀을 캐내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설사 비밀을 안다고 할지라도 꺼내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강력한 방사선 원소인 신물질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퀴리부부가 노벨 물리학상 시상식에서 한 말이다. 20세기 과학혁명이 중심이었던 아인슈타인. 그는 과학자의 재능과 업적이 돈과 명예, 국가이데올로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낀다고 했다. 그런 그가 퀴리부부를 가리켜 그 모든 저명인사 가운데 명성이나 축재 때문에 부패하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들은 돈방석에 앉을 수도 있는 ‘라듐’ 제조방법을 개발했으나 특허를 내서 상품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라듐’의 소유자는 지구이며 그 누구라도 이것으로부터 이득을 취할 권리는 없다고 했다. 바로 퀴리 부부에게 과학은 인류의 도덕적 유산이다.
e=mc2 방정식은 에너지 공식으로 그 결과물은 전쟁이다. 고로 과학의 발전에 공헌한 것도 전쟁이며 지금 과학은 전쟁의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아무리 위대한 기술이라도 그것이 인간을 중심으로 하지 않거나 생명에 대한 생각 없이 또 자연에 대한 경외심 없이 만들어진 것은 인류에게 희망이 아니라 비극이요 불행이다. 모든 정책책임자들 그리고 시대 담론을 이끌어가는 지식인, 종교인, 철학자, 기술자, 과학자, 그 모든 사람들이 새해 벽두에 마리와 퀴리의 그 위대한 생각을 한번 곱씹어 보았으면 한다.

삶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통한 자각과 선택이 최선
이제 우리 모두가 삶에 대해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성찰하면 어떨까! 혹시 그 하찮은 소유물의 노예가 되어 섬기다가 마음이 피폐한 채로 일생을 떠나지는 않을까. 그 우매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내 모습이 나이가 들수록 작게 보인다. 날마다 황폐해져 가는 현실을 아파하면서도 어찌하지 못한 채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그런 삶 속에서도 행복을 찾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이 바로 내 모습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은 배울 수 있고 보고픈 게 있어 행복하다. 쳐다만 봐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곳에 갇혀 사는 하이페리온들이 전혀 부럽지 않다. 사람들이 지친 삶과 영혼을 쉬게 하고자 산을 찾고 숲을 찾아 해매는 뜻을 나는 안다. 모천(母川)에 회귀하는 연어들이 돌 사이로 흐르는 물을 거스르며 올라간다. 그 암컷 뒤에 또 하나의 연어가 따라 올라간다. 앞의 암컷 연어는 알을 난 후 힘없이 옆으로 쓰러지면 뒤따르던 숫놈이 우유빛 정액을 알 위에 뿌려놓고, 암놈 옆에 누워 함께 죽어가는 모습은 애처롭다 못해 처절하다. 이 계곡에서 태어나 바다로 나가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살다가 자기의 수명이 끝났음을 알고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회천한다는 연어의 일생. 뉘라서 이때 자연의 섭리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있으랴! 만물의 영장인들 이러하랴. 자연의 경이로움이 눈시울을 적시게 하고, 나 자신의 내면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게 한다. 바로 사람들의 지친 몸을 산과 들, 숲에 맡기는 것은 이 연어처럼 자연 회귀의 본질에 대한 노스텔지아다. 그것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삶의 본질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제 우리가 쉬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곳. 어머니 품 같은 그 자연 앞에 겸손해지자. 이 각박한 세상에서 꾸밈도 자랑도 없이 그 자리에 있어 우리를 맞이하고 쉬게 하고 편안함을 주는 자연! 우린 그것을 가졌으니 부자 아닌가. 뼈 속 깊이 밀려오는 아침의 청량한 공기, 그리고 의연히 서있는 늙은 소나무에게서 내가 인내와 베품과 위로를 얻으니 자연이여! 신이 빚은 최고의 작품이 인간 아닌 너였구나. 인간은 호모사피언스(Homo Sapiens)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지식과 욕심으로만 꽉 차고, 지혜를 상실한 사람들만 들끓는 것 같아 답답하다. 우리 모두가 평생 하찮은 소유물의 노예가 되어 물질을 섬기다가 마음이 가난한 채로 일생을 마치는 우매함에서 깨어나, 사람과 자연이 함께 서로 껴안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인간과 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화해하는 것을 모색할 때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의 잘못된 현상에 대해 문제의식을 지니고 자기로부터의 혁명을 이뤄내야 한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이뤄진 자각이나 선택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좋은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온누리의 생명을 위해 사회는 평화롭고 안전하며, 이에 인간은 행복하고 자연은 아름다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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