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對 과학’ 그 허상과 진실

편집국 | eco@ecomedia.co.kr | 입력 2005-10-20 14: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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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눈으로 들어나지 않는 허점을 과학으로 깨닫기 어렵다. 이럴 때 인문사회의 시각이 필요하다. 과학 대 과학이 아니다. 인문사회와 만날 때 과학은 비로소 자신의 편향을 깨닫고 허점을 메울 기회를 얻는다.”

토머스 쿤이 일찍이 지적했지만 과학에도 패러다임이 있다. 문학사조와 같은 사상의 흐름이 있다는 것인데, 딱딱한 과학이 부드러워진 것인가. 찾아내고 또 찾아내면 이데아와 같은 불멸의 진리가 짠! 하고 모습을 드러낼 것 같은 과학, 하지만 이미 숫한 경험을 통해 한 가지 진리는 찾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진리를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있겠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가정이 겹겹이 존재한다. 아쉽게도 현실 세계에서 그런 가정은 통용되지 못한다. 법칙을 논하기에 민망하게도 예외가 속출하고 예외는 다시 새로운 법칙을 요구하지만 그 법칙도 고개 내미는 예외에 굴복하고 만다.
현실 속의 과학논쟁을 듣다보면 어려운 개념인 ‘토머스 쿤’이니 ‘패러다임’이니 ‘가치중립’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 환경운동의 현장 또는 관련된 토론장에서 만나는 양측 과학자들의 주장을 들으면 더욱 그렇다. 자신의 이론을 들먹이는 과학자들이 상대방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서로 비난한다. 듣자니 헷갈린다. 온갖 가정이 뒤죽박죽된 가운데 펼쳐지는 이론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해한다고 해도 어느 편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쪽에서 들으면 이편이, 저쪽에서 들으면 저편이 맞는 것 같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면 또 헷갈린다.

허점과 편향 ‘두 얼굴의 과학자’
핵 폐기장에서 만나는 과학자는 어느 편에서 나왔는가에 따라 판이한 주장을 펼친다. 이산화탄소를 내놓지 않아 친환경적이라고 주장하는 과학자와 핵폐기물을 남겨 암울한 내일을 물려준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새만금 간척사업에서 우린 상반된 주장을 들었다. 수질문제가 충돌하고 개발과 보전의 가치가 반목한다. 논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결론은 판이한데, 상대방의 논점을 객관적이지 않다고 과학자들은 비난한다. 요즘 뜨고 있는 생명공학도 마찬가지다. 과정과 결과가 인류복지를 앞당길 것으로 주장하는가하면 그러므로 비윤리적이고 위험하다고 문제 삼는다.
그럴 때 우리의 판단을 도와주는 한 가지 팁이 있다. 과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배경이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혹시 그 주장에 어떤 편익이 은근히 계산돼 있는 건 아닌지, 저런 주장을 하지 않으면 모종의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과학자들 주장의 이면을 살펴보면 덜 헷갈린다. 자신의 이익과 거의 관련이 없는데 앞장서다 ‘신세 망치는’ 과학자가 있다면 그의 주장은 일단 새겨들을 가치가 있을 것 같다. 시민들, 환경가치, 사회적 약자들, 내일의 시민들을 위한, 이른바 ‘시민과학자’가 없는 건 아니다.
흔히 과학은 발전한다고 한다. 발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과학자들은 비장해 하기까지 한다. 왜 발전해야 할까. 현재 과학기술이 찬란하다 하지 않았던가. 역시 찬란했던 그리 멀지 않은 과학을 잠시 들여다보자. 과거의 과학을 돌이켜보면 참 허술하고 무모했다. 냉매에 관련된 예를 한 가지만 들어보면, 흔히 프레온가스라 칭하는 염화불화가스를 입에 물고 촛불을 끄는 실험을 연출하자 주위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안이 멀쩡한 게 아닌가. 사고뭉치였던 암모니아가스를 대신할 획기적인 발명품을 선택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어 보였던 당시, 오존층이나 지구온난화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렇듯 허점을 찾아 메우며 세련되게 발전하는 과학은 프레온가스를 대신할 냉매를 개발했지만 그 냉매는 새로운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과학기술의 허점, 언제 누가 다 메울 것인가. 가능하기는 할까.
내일 기준으로 허점이 많은 현재의 과학이 안전하다고 과학자들이 주장하면 반드시 안전해야 할까. 과학으로 모는 게 가능하다는 이른바 ‘과학주의’로 무장된 생명공학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상스럽게 현재 과학기술로 확인하는 ‘사전예방원칙’을 근거로 안전이 확인되기 전까지 사용을 보류하자는 과학자들의 의견이 무시되곤 한다. 일단 사용하다 문제가 드러나면 그때 해결하자는 ‘실질적동등성원칙’으로 대신하자는 과학자의 주장이 힘을 얻기 때문이다. 소비자를 두둔하는 사전예방원칙과 자본과 생산자의 주장을 대변하는 과학자의 힘이 이렇게 다른데, 우린 어떤 목소리에서 신뢰를 느껴야하나.
핵에너지 관련 과학이 저지른 실수를 우린 잊지 못한다. 값싸고 안전하며 무궁무진하다고 강조했지만 실제는 어떠했던가. 그런데 핵에너지는 지금도 관성을 잃지 않는다. 핵발전소는 거듭 문을 열고 돈으로 유혹하는 핵폐기장 유치 유혹은 지역사회를 갈라놓는다. 멋진 논리를 일방적으로 내세우는 요즘의 생명공학은 실수가 없을까. 일방적일수록 맹점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과학이 기술과 만나 거대해지자 과학의 가치는 연구비 출처의 입김에 상당히 편향돼 있다. 내게 얼마 제공하면 나는 당신에게 어느 정도의 수익을 보장한다는 연구비 신청서는 그 증거물이다. 허점과 편향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보편적 가치’ 실종된 과학 … 대안은 ‘시민과학’
과학의 명분은 멋지다. 일찍 태어난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인류복지와 부가가치를 약속한다. 그 약속은 보편적 가치를 추구할까. 월화수목금금금, 잠도 없이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보편적 가치에 대해 고민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실험실 경험을 밑천으로 하는 과학적 논쟁에 그치지 말고 내 연구에 허점과 편향된 점은 없는지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의 눈으로 들어나지 않는 허점을 과학으로 깨닫기 어렵다. 이럴 때 인문사회의 시각이 필요하다. 과학 대 과학이 아니다. 인문사회와 만날 때 과학은 비로소 자신의 편향을 깨닫고 허점을 메울 기회를 얻는다.
과학을 모르는 정책결정자는 인문사회를 모르는 과학자가 그린 애드벌룬에 황홀해한다. 그 결과로 위험사회는 나타났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거대한 과학의 이익은 보편적이지 않고, 피해는 계층적이다. 일부 계층의 자원과 에너지 과소비의 폐해는 이익을 누리는 계층과 절연돼 있다. 이렇듯 과학이 일방적일 때 보편적 가치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 인문사회의 참여가 대안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과학, 다음 세대의 인간을 위한 인문적 가치의 과학은 생태계의 안위를 살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학의 보편적 가치를 먼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최근, 기술과 만나 거대해진 과학을 사회의 눈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주목된다. 과학기술에 사회를 포함한 ‘과학기술사회’다. 이른바 ‘시민과학’이다. 시민의 얼굴을 한 과학, 인문사회가 선도할 때 가치를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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