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기억, 그리고 지율스님

편집국 | eco@ecomedia.co.kr | 입력 2005-03-02 16:4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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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삼십년 전, 성탄절이 다가오면 시내는 몰려드는 인파로 북적였다. 사방에서 울리는 캐럴, 구세군 냄비 타종소리, 카드 판매 노점상들로 뒤엉킨 도시의 뒷골목은 12월 초부터 으레 술콰하게 흐느적거리는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귀전을 때리곤 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어느 종교를 믿는가 여부를 떠나 7, 80년대 성탄절 분위기는 대개 그랬다.
‘크리스마스는 가정과 함께’라는 구호가 방송매체와 거리의 확성기에서 들뜬 시민들을 다독거려야 했던 시절에서 거의 한 세대가 흐른 요즘, 크리스마스 이브는 그리 시끄럽지 않다. 내 집 남의 집 가리지 않고 복조리를 강매하던 젊은이도 이젠 찾을 수 없다. 주말마다 인파가 몰리는 시내의 주요 지점을 빼놓고 평상시와 그리 다르지 않다. 신앙인들은 가족과 일찌감치 교회를 찾고 간단히 외식을 한 후 집에 들어와 쉬는 풍경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우리 사회가 성숙해진 것이리라.
성탄절을 맞은 거리가 조용해진 것을 다행이라 여기면서 한편 쓸쓸한 느낌도 들었다. 경건해야 할 날, 부랑배처럼 거리를 휘젓고 나니는 것이야 나무랄 일이지만, 성탄절을 핑계로 친구나 가까운 이웃들이 만나 모처럼 한잔 술 기울이고 이야기꽃을 만발하는 것이야 나쁘지 않을 텐데, 속도경쟁이 치열한 산업사회에서 개별화된 시민들의 삭막한 마음은 예보다 더욱 심해진 것은 아닌지, 아쉬움이 가슴을 저민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없다는 걸 눈치 챈 아이들이 다 커버린 것과 관계없이 이번 성탄절은 내겐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없게 했었다. 12월 25일은 지율스님이 네 차례 단식을 시작한 지 60일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58일을 계속한 3차 단식 이후, 보식 기간도 충분하지 않았는데, 세 차례에 걸친 단식으로 지친 몸도 다 회복되지 않았는데, 두 달이나 계속되는 단식으로 지율스님의 몸은 성한 구석이 없다. 이러다 큰일 치룰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명을 무릅쓰는 단식을 왜 네 차례나 계속해야하는지 관심도 없는데, 허무하게, 진정 허무하게 스님의 생명이 스러질까 여간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다.
천성산을 종축으로 뚫는 고속전철 터널은 필시 산의 생명을 위협할 것이다. 터널이 뚫리기 시작할 때 풀벌레와 도롱뇽이 무심코 지나가는 당신께 다급하게 애원했던 살려달라는 소리를 잊지 못하는 스님은 이 엄동설한에 한 마리의 도롱뇽이 되어 청와대 앞 모처에서 단식으로 항변을 하고 있는데, 아무 것도 함께 행동할 수 없는 처지에서, 단식을 풀어달라는 부탁할 어떠한 명분도 찾을 길 없어, 믿는 종교에 관계없이 많이 이 기뻐하는 성탄절을 남들처럼 노래할 수 없는 것이다.
단식으로 수행하는 저항은 준비 없이 아무나 섣부르게 시도할 수 없는 경지의 몸짓이다. 곡기만 끊는 것이 아니라 정신이 고도로 충만 되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단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짐하는 지율스님, 그가 스스로 감내하려는 고통의 깊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롱뇽 한 마리 때문에 수조원이 들어가는 국책사업이 저지될 수 있는가 따진다.
하루 교통사고로 죽는 인구가 몇인데 비구니 한 생명 때문에 국가정책을 중단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관료도 있다. 사회의식 수준이 이렇듯 천박한데, 누가 외롭기 짝이 없는 스님의 단식을 마음으로 이해하려 들 수 있을까.
지율스님의 단식은 도롱뇽 한 마리의 생명 때문만이 아니다. 내막을 아는 이는 약속을 저버린 대통령과 청와대와 환경부장관과 법원의 양심을 묻는다고 한다.
하지만 스님의 단식은 그 이상이다. 약속을 밥 먹듯 팽개치는 정부를 탓하기보다 그들에 맡겨야 하는 후손의 생명을 보전하려고 저토록 고통을 감내한다는 것이다. 실리주의로 포장된 돈의 철학에 빠진 세상 사람들은 단식의 의미를 감지하지 못한다. 깊어만 가는 단식, 38일, 45일, 58일, 성탄절을 지나 60일…. 그이의 목숨은 우리 후손의 생명일진데, 제 자식 귀한지 모르지 않는 세상은 왜 이리 싸늘할까.
세상의 죄를 씻고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행동과 후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곡기를 끊은 지율스님의 수행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는 예수의 고통을 비웃었던 태도와 지율스님의 단식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구원한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무리들은 경각에 달린 지율스님의 목숨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게 아닐까. 성 프란체스카는 미천한 생물의 목숨은 사람의 목숨과 다르지 않다고 했거늘, 한 비구니의 생명은 거들떠보지 않는 도롱뇽 한 마리처럼 미천해야 하는 것일까.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12월 24일이면 친구들과 만난 우리는 “기쁘다구! 酒오셨네!” 하며 술을 들이켰고, 그 모양이 보기 싫은 어떤 신부님은 “고약한 밤, 거북한 밤, 어둠에 미친 밤”하며 자제를 당부했다. 그때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은 요즘 경쟁사회에서 밀리지 않으려 아등바등 산다. 성탄절 전후, 조용히 지내고 싶어 한다. 조용한 생활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다. 친구나 이웃들을 만나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다. 자식들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한 공부 가리키고 가족과 먹고살기 위해 절치부심하느라 조용해야 한다.
자식과 식구들과 내가 두루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모두 건강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몸도 마음도. 가족이 행복하려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이웃들이 두루 건강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에 관심과 애정을 보여야 하는데, 왜 제 앞가림에 눈이 멀까. 예수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게 아닌데, 그런 예수의 탄생을 이제 와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왜 스러져가는 지율스님의 생명에 관심을 보이지 못할까. 찬바람은 더욱 매서워지는데.
지난 성탄절에 필자는 전에 어울렸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아등바등 사는 친구들과 모처럼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를 새삼 되새기고 싶었다. 기쁜 날, 더욱 기뻐야 할 내일을 위해, 오늘의 잔을 들고 싶었다.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만큼, 천성산보다 소중한 지율스님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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