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족이 모여 살던 우리 집은 공동 화장실이 들판을 바라보는 집 뒤편에 있었고, 한달마다 쌓인 변을 주기적으로 퍼내야 했던 재래식 뒷간이었다. 마치 요즘 아파트 복도에서 “세-탁-, 세-탁-”하며 지나치는 목소리처럼, 하루에 한 두 차례 “똥 퍼-, 똥 퍼-”, 마을을 순례하는 낯익은 분이 있었고, 집을 관리해야 했던 어머니는 한 달이면 한 차례 그분을 불러야 했다.
달라는 대로 군말 없이 내주던 어머니와 달리 어쩌다 찾아온 외할머니는 그 ‘똥퍼 아저씨’를 불러놓고 다짐을 받고 감시도 철저했다.
긴 작대기 끝에 각 한 통씩, 한번에 두 통씩 퍼담아 나르는 아저씨가 통 가득 담는지, 마지막 통은 반만 담겼는데 돈을 다 받으려는지 꼭 확인하려 했고, 야박한 마음에 심사가 뒤틀린 똥퍼 아저씨는 이웃 마을 채마밭 가장자리 두엄 웅덩이에 부리지 않고 배추와 무가 자라 올라가는 바로 집 뒤 밭에 냅다 뿌리곤 했다.
이렇듯 우리 집 뒷간에 모인 똥은 우리들의 놀이터인 채마밭이나 과수원으로 갔다. 이랑마다 똥이 뿌려지면 우리는 잠시 코를 막아야 했고, 채마밭에서 과수원 언덕으로, 과수원 언덕에서 다시 채마밭으로 놀이터를 옮겨야 했다.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가 놀던 논과 밭에서 싱싱한 채소와 쌀을 샀고, 우리 똥은 어김없이 논과 밭으로 갔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던 시절, 코발트 색 가을 하늘은 눈비시게 맑았고 흐르는 시내에는 온갖 물고기로 가득했다.
그 넓던 논과 밭이 메워져 주택 상가 공장 소방도로가 건설 또 건설되고, 동네 야채가게 몰아낸 슈퍼, 번듯해 보였던 슈퍼 몰아낸 대형 쇼핑센터가 화려하게 들어선 지금, 우리 아이들은 놀 곳이 없다. 주중이라면 학원을 전전하며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다지만 문제는 주말이다. 주차장이 모자란다고 그 알량한 어린이 놀이터를 줄이려는 아파트 단지에 빼곡히 모여 사는 어른들은 시간당 계산하는 어린이놀이터에 아이를 보내거나 미국에 있다던 베이비시터를 불러야 안심이 된다. 자동차도 사람도 도무지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학교나 학원에 보내는 요즘 엄마들도 가족들의 밥을 준비하는데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한때, 근사한 리무진 버스에 몸을 실으면 백화점으로 편안히 인도되었던 독과점 시대도 있었지만 요즘은 대개 승용차를 몬다. 냉장 에어커튼이 보기에도 시원한 대형 식품매장엔 곱게 차려입은 상냥한 점원 아가씨가 어제와 똑같이 친절하고, 낯선 미소를 머금는다.
다듬을 필요도 없이 가지런한 야채, 데우기만 하면 진수성찬인 식품들로 가득한 매장의 구석구석에는 감시 카메라가 번뜩이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돈만 내면 아무 탈 없다. 얼마 전, 파리채 집어던지며 문 닫아버린 무뚝뚝했던 동네 야채가게보다 값도 훨씬 싸고 물건도 다양하다. 시간만 잘 맞추면 깜짝 세일로 값싼 생선 한 무더기를 덤으로 챙길 수도 있다.
시골 아이들 똥엔 파리가 앉는데 도시 아이가 눈 똥엔 파리가 통 앉으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여름 놀러갔던 야영지 인근 노천 화장실을 기억해 보시라. 재래식 뒷간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는 아이를 달래 엄마가 망보는 사이 사용했던 노천 화장실을 떠올려보자. 군데군데 보이는 똥은 햇볕에 말라 가루로 흩어질 뿐, 구더기가 끓지 않는다. 왜 그럴까? 밭떼기로 매점매석을 일삼는 중간상인과 그 상인과 대규모로 거래하는 백화점 식품매장의 책임자는 그 까닭을 충분히 짐작하리라.
자급자족하며 이웃 사이에 수확물을 나누어 먹던 가족농 시절, 콩 심던 아낙은 ‘한 알은 새가 먹고, 한 알은 쥐가 먹고, 한 알만 싹 트게 해’ 달라고 노래했다는데, 지금은 어떤가. 농협 빚내어 종묘상에서 씨앗 사야하고, 업자가 미리 실어다 주는 화학비료와 살충제 사야하고, 할부금 다 내기도 전에 고장나는 무거운 농기계로 석유 펑펑 태우며 땅 꾹꾹 누르며 농사지어야 손해 입지 않는 산업농 시대에 우리의 농촌은 환금작물(換金作物)로 지천이다. 이익은커녕 이자라도 갚으려면 소출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러는 만큼 농약 듬뿍 치고 기계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밭떼기로 나 몰라라 판다.
미국에서 수입하는 콩과 옥수수는 유전자가 조작되었다. 한때, 물고기 유전자를 넣어 잘 무르지 않는 토마토도 수입한 적이 있었다. 미국 산 콩과 옥수수의 절반 이상은 특정 농약에 끄떡없도록 작물의 유전자를 조작했다. 우리 상품명이 ‘근사미’인 고독성 농약을 뿌리면 작물이던 잡초(잡초는 없다!, 윤구병, 보리, 1998)던 몽땅 죽는다. 일단 근사미를 흠뻑 뿌려 보이던 잡초를 모조리 죽인 후, 그 특정 작물을 심으면 노동력이 줄어들고 돈도 잘 번다, 인체에 무해하다, 콩과 옥수수의 유전자를 조작한 다국적기업은 그렇게 주장한다. 아니 식물에 유해한데 어찌하여 인체에 무해하담? 식물 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있나? 다국적 기업의 논리는 오직 ‘돈’이다. 생태계도 후손의 생명도 안중에 없다.
자급자족 지역 분산의 시대를 넘어 바야흐로 중앙 집중의 시대가 왔다. 동네를 지역을 국가를 나아가 지구촌을 중앙의 의지에 따라 획일화시켰다. 언어도 식성도 습관도 하다못해 감탄사까지 세계가 공통이다.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어떻게 만들어 냈을지 소비자들은 전혀 모르는 무엇을, 굶기 싫으면 중앙이 시키는대로 먹고 입고 사용하고 말하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달라는 만큼 돈을 내야한다. 내 돈 내며 중앙의 눈치를 살피면서.
이 땅의 생명들은 이 땅의 문화와 역사를 아직 기억하는데, 오랜 세월 그렇게 잘 살아왔는데, 그래서 몸도 마음도 늘 건강했는데… ‘똥퍼 아저씨’를 기억하는 우리는 불과 한 세대 만에 자신의 아이들을 중앙에 굴종하며 내맡겼다. 그들에게 내일을 맡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과학기술 민주화를 위한 모임 운영위원,
생명안전·윤리 연대모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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